박천욱 작품에 대해서: 온전한 주체의 가능성 _ 김상우, 2015
박천욱 작품에 대해서: 온전한 주체의 가능성 미술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미술의 시작은 작가로부터일 것이다.(박천욱) 1.미술의 ‘주체’는 누구일까. 미술이란 작품의 역사적 집합이며, 그것의 원소를 창작하는 작가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해 보이지만, 현대미술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쨌든 박천욱은 이 질문을 살짝 뭉개며, 적어도 기원은 작가라고 설명한다. 지적한 대로 작업은 미술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필요조건’이란 용어가 딱 맞는 것처럼 보인다. 충분조건이 되지 못하는 요건인 것이다. 박천욱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의 내부 프로그램으로서 <생강의 모양>(2015)을 직접 기획해, 관련된 문제의식을 (우연한 형태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작가가 기획하는 전시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나, 기획의 취지가 제법 흥미롭다. 우선, ‘작가들을 위한 전시’를 내세우며, 다섯 가지 사항을 지적한다. 첫째 작업의 기원으로서 입시미술, 둘째 공개되지 않은 실패한 개별 작가들의 이력들, 셋째 작가의 ‘인정’을 둘러싼 블랙박스 같은 시스템, 넷째 인정과 의문의 간극을 결정하는 국공립 기관이란 제도들, 다섯째 시스템의 단위로서 기능하는 작가. 따라서 <생강의 모양>은 미술계의 이면(근원)을 드러내는 동시에, 메타-미술의 영역을 타진하는 셈이다. 2.전시의 형태는 비교적 소박하다. 난지 소속 작가들이 입시학원에서 배웠을 법한 드로잉과 조형물을 제작하여 배치했고, 원형태의 벽면에 개별 작가들이 무수한 실패했던 이력들을 채워 넣었다. ‘생강’을 소재로 선택한 이유가 흥미롭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요즘 생강을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많이 듣기는 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희미한 것. 직접 그리면 당연히 형태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 박천욱은 이 점을 파고들어 인정 기준이 모호한 미술기관의 행태와 작가의 위치를 되짚는다. 생각해 보면, 작가들은 어느 직업군보다 시험을 많이 본다. 대학교 입학부터 시작해 공모전과 레지던시 등 끝없이 시험을 치르며, 그때마다 평가를 받는다. 사실 박천욱 본인도 ‘인정’을 받은 경우이긴 하다. 난지창작미술스튜디오 입주작가로서 이 전시를 기획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정직하게 질문하며 한 발짝 나아간다. 내부에서 자각하고 의식한 후 실현한 것이다. 발 딛고 있는 곳에서 발 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매일같이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더라도, 자신의 맨얼굴을 인식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것은 성찰의 영역이다. 따라서, <생강의 모양>은 일종의 내재적 비평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근원을 질문하는 태도며, 현대미술에서 이제는 희귀생물 같은 모습이다. 3.‘작가’야말로 근대적 주체의 마지막 ‘유물’이 아닐까. 세상과 홀로 맞서며 실패할 줄 알면서도 의미를 찾아나서는 화석 같은 존재. ‘근대적 주체’란 과거에 일치감치 실패로 끝난 기획이며, 이론적 가상이란 것이 밝혀진지 오래다. 더더욱 오늘날이야 시대착오라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마주서서 근원을 질문하는 태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며,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언제나 가치가 있다(고 한다). 시스템의 단위로서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게 아니라, (가능하다면) 체계 바깥에서 체계 전체를 오롯이 조망하고 성찰하는 것은, (가상일 지라도) 필요하다. 체계내부의 질서를 작게라도 흔들어보는 것이다. 그런 울림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따지는 것은 이후의 문제다. “진리는 진부한 것이다.”(고진) 그렇기에 망각되기 일쑤며, 진리를 담지하는 “정보들은 말하자면 불안정을 야기하기 때문”에(볼츠) 은폐되기 쉽다. 익숙해서 혹은 너무 당연해서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을 들추어내는 것은 근원을 찾는 모습이다. 어쩌면 이처럼 부정적인 형태의 실천에서 주체로서 작가의 가능성이 (실낱 같이) 드러나는 게 아닐까. 4.근원을 묻는 권리가 있는 존재로서 작가. 거울의 뒷면을 궁금해 하며 들추는 사람은, 의심을 품는 성찰을 기억하는 존재는 많지 않다. 게다가, 현대의 각종 시스템은 작가를 포함해 그러한 질문을 하는 존재들을 집요하게 차단한다. 체계의 요소로서 아니면 프로젝트의 단위로서 기능하길 바라며, 그렇게 훈육한다. 거세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미술의 경우는 포트폴리오, 프리젠테이션, 프로젝트 등, 각종 시스템의 수호자들이 개별적 목소리의 굴곡들을 평평하게 마름질하기 일쑤다. 5.다만, 생각해볼 사항은 존재한다. 박천욱이 ‘기획’을 통해서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즉 형상이 아니라 개념을 통해서 접근했다는 얘기다. 물론, 작가 개인의 작업에도 흔적이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각종 기성품의 기능과 구조를 변형해서 익숙한 감각을 익숙하지 않게 하는 작업들이나, 기능의 기능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믿음 없이> 연작을 생각해 보라. 전통적 조각의 조형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일종의 기능전도를 통해서 기능자체를 무효화한다. 즉 조형성을 위해서 기능성을 완벽하게 희생시킨다. 외에도 <당신 없이> 영상도 생각해 볼 점이 많다. ‘화이트 큐브’에서 신체를 스스로 하얗게 칠해서 지우며 마침내 완벽히 소멸되는 행동은 축적이 아니라 제거를 환기하며, 일종의 ‘부정적 생산’을 함축한다. 이렇듯 박천욱의 작업들은 대체로 여러 가지 종류의 전도를 통해서 이면을 들추고 근원(구조)을 엿보는 작업들이다. 그렇게 본다면, <생강의 모양> 역시 박천욱의 작업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여 확장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시의 목적도 내용도 방식도 기존의 것들을 뒤집기 때문이다. 6.하지만, <생강의 모양>처럼 문제를 조직적이고 전면적으로 제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서들을 이곳저곳 작업들에 흩뿌려 놓았다고 할까. 물론, 이것은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개념이 아니면 대결할 수 없는 상황, 예술의 전통적 언어인 형상으로 잡히지 않는 복잡한 현대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일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조차 유감스럽지만 악몽일 공산도 배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꼬리물기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강의 모양>에서 ‘입시미술’을 기원의 은유로서 사용했던 것처럼, 역사적으로 주체의 기획이 착각으로 판명됐던 것처럼, 이 역시 체계라는 폐쇄회로에서 돌아가는 ‘루틴’일 가능성을 떨쳐내기 힘들다. 문을 열어도 문이 나오는 출구 없는 미로처럼 말이다. 김상우 (미술비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