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닉하는 모순 _ 신동혁, 2021

박천욱 개인전: 아니라 말하고 예라고 행동할 때

 

재료

예술에서 재료는 우리에게 작품을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과 배경을 제공한다. 이때 작품의 재료는 그 지역이 성립 및 유지되는 인문적 기반에 따라 다양하게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거나 흡수된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지역의 지리적․물질적․정서적 특성에 따라 형성되는 지역의 개성 또한 재료라는 개념을 통해 일정부분 고유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재료라는 요소 한 가지를 통해서도 지역의 풍토, 역사, 전통, 개성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표현 욕망/의도가 제작한 작품을 통해 발현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요소 중 작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역의 예술 재료’가 있다.

문래동에서 예술은, 주변이 낯설고 불편해도 결합하려 애쓰고 있다. 공간이 만드는 이상한 중력, 공장 사람들의 시선, 혹은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는 소리, 냄새, 다양한 재질의 사물, 물질 등. 그것들이 몸을 투과해 나가는 또 다른 어떤 느낌. 그러한 문래동과의 대면에서 오는 심리적 느낌 혹은 변화가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그 느낌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빙의되듯 늘 근처에 있는 것, 나아가 작품을 만드는 하나의 재료로, 작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작업이 문래동을 통해 출발하거나 개념이 생성된 것은 아니다. 단지 은유적으로 문래동에서 보이는 어떤 현상들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은유의 단초도 지역의 예술 재료로 작가에게 선택될 수 있다. 황동은 작업의 주요 재료 중 하나다. 박천욱은 “작업실을 지나다니면서 철과는 다른 느낌으로 이것이 장식적인 것처럼 다가왔다”고 말한다.

기생

이번 전시에서는 모듈 작업들이 사물에 기생하며 자라나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박천욱은 모듈들을 통해 조각도를 넣는 가방과 화방 가방을 쓰지 못하게 만들고 조소 좌대(판 안에서 점토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했다. “작품을 만들지 못하게 의도한 것이 오히려 작품이 되는” 모순적 상황이다. 게다가 모듈들은 라바콘(안전고깔)에 결합하여 사물 자체를 파고 들어가서 “사물에 맞춰 생성되는 작품에서 오히려 기생이 주가 되는” 모순적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은닉하는 모순은 기생들이 사물의 본래 기능을 상실시킬 때 드러난다. 이것은 사물의 기능하는 공간을 작품이(혹은 예술성) 차지하는 과정 안에서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사물(혹은 재료)은 미적 기능을 얻고 문래동에서의 어떤 영향을 받아 선택된 듯 보이는 재료와 지역과의 관계성은 사라진다. 동시에 기생하는 작업들은 은닉하는 모순의 가중치를 받아 사물을 예술의 층위로 나아가게 만든다. 기생들이 완성되는 조각으로 펼쳐졌을 때 그것은 주체적으로 보이기도 하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어떤 감각적인 반응을 느낄 수 있다.

자립

<주체롭게> 시리즈는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작품, 어떤 환경과 공간에서 독립적인 작품, 그 작품이 선행적으로 말과 내용과 의미를 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을 말로 보여주려 하는 모순적인 시도이자 작품의 자립을 위한 실험이기도 하다. 박천욱은 “미술이 사회적 환경이나 배경 외에 미술 그 자체로 가질 수 있는 주체성을 확보하는 방법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오히려 그 주체성을 기생의 의미에서 가져오는 모순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작품은 자립할 수 있을까? 자립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런데 어떤 곳에 기생하지 않고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작품이 있을까? 우리는 원래 있었던 기능을 상실하고 그것에 대체물에 불과한 미적인 기능을 획득한 작품을 자립한 것이라고 착각할 수는 있다. 이런 경우 ‘자립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이미 잘못 제기된 질문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작품은 그냥 거기에 있다. 우리가 보는 이 작품의 자립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보여줘야 하는가? 여러 사물에 기생하는 재료, 은닉하는 모순, 자립하는 작품을 보라. 작품의 자립을 보여주려는 박천욱의 시도는, 역사 속에서 우리의 어떤 미적 가치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아닐까? 그는 이 질문들에 ‘아니라 말하고 예라고 행동’한다. 은닉하는 모순과 함께.

신동혁(독립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