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성(spontaneity)의 조형 _ 조중걸, 2013

자발성(spontaneity)의 조형

예술사가인 나의 입장에서는 어떤 작가의 작품 군에서 가치 있는 어떤 요소를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거기에 있지 말아야 할 어떤 요소가 있지는 않을까에 관심을 가진다. 이 관심은 물론 불안을 동반한다. 작가에게서 시대착오적이거나 키치적이거나 거짓된 모습을 발견하는 때가 왕왕 있고 이 경우 크게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박천욱 작가는 이러한 위험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매우 희망적이다. 그는 먼저 그의 작품에서 의미부여, 정형성, 상투성을 제거함에 의해 많은 작가들이 빠져드는 위험을 잘 피하고 있다. 자기 작품을 내재적 의미를 동반하는 어떤 것으로 보여 주고자 하는 시도는 자주 작가의 작품을 망치고 그의 미래까지도 암담하게 만든다. 현대는 근대가 “의미(meaning)”를 연역의 기초로 봄에 의해 파시즘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에 예민하다. 이것이 트리스탄 차라로 하여금 다다이즘 선언을 하게 만든 동기이다.

박천욱 작가가 가장 주력하는 것은 작품 자체의 “자발성(spontaneity)”인 듯하다. 그는 그의 작품들이 하나의 점(point)에서 시작하여 스스로 자라나서 점점 더 복잡한 유기체가 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의 가장 중요한 미학이라 할 만한 미니멀리즘과 “저자의 죽음”을 조형 예술에 도입한 최초의-내가 아는 바-시도 이다. 매우 독창적이다.

작품에서 작가는 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작가의 존재는 언제라도 지성의 회복을 의미하며 그것은 이미 실패한 지성을 되살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박천욱 작가는 이를테면 하나의 나무토막을 바다에 던져 놓는다. 그것으로 작가의 역할은 끝이다. 이제 거기에 온갖 것들이 들러붙어 스스로의 운명을 살아갈 것이다. 박천욱 작가의 작품군은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작품 자체의 자발성에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현대적이다.

하나의 아쉬움: 예술은 진실의 심미적 표현이어야 한다. 박천욱 작가는 확실히 진실하다. 단지 작품이 좀 더 세련된 미적 요소를 갖춰졌으면 하는 것이 멘토로 지정된 나의 사적 희망이다.

조중걸 (사학자, 철학자)